-
[에두아르도] 간절함이 만들어 내는 변화-『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90분』SPECIAL REPORT 2014. 1. 5. 21:39
새해다. 느지막이 일어나 목욕 재계 후 조용히 집을 나왔다.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시킨 후, 2014년 다이어리를 펼쳤다. 아직 빳빳한 다이어리엔 군데군데 토익이니 오픽이니 하는 시험 일정과 결혼식 몇 개, 연주 일정이 적혀 있다. 커피 한 모금, 긴 한 숨. 그리고 1월부터 3월까지의 계획을 짠다. 필요한 돈은 얼마인지도 체크해 본다. 턱없이 모자란다.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한 개피 물고, 아르바이트를 추가한 새로운 계획을 짠다.
주변을 싸고 도는 연기에 목이 따끔해 질 때쯤, 마지막 담배 한 모금에 복잡한 마음을 후욱, 불어내고 흡연실을 나와 책을 편다. 빌려 두고서 일 주일 가까이 읽지 못하고 있던 책이다. 제목은『내 생애 가장 자유로운 90분』. ‘90분’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하기에, 꺼내 들었던 책이다.
이 책이다. 『내 생애 가장 자유로운 90분』, 아위스타 아유브 저, 2011, 샘터. (출처=www.kyobobook.co.kr)
너무도 먼 나라,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생 때다. 당시 집권 세력이던 탈레반 정권이 세계 문화유산 중 하나인 다미앙 석굴의 불상을 전투기로 폭격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의 이름이 각인된 것은 9.11이라는 전대미문의 테러 사건 때문이다. 미국은 이 테러의 배후를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로 지목하고, 탈레반 정권이 이들을 아프가니스탄에 은닉하고 있다는 혐의를 들어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킨다. 대학생이 된 뒤에는 무장 테러 조직에 한국인들이 피랍, 몇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의 삶과 그다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아니지만,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나라도 아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독재, 전쟁과 테러, 납치 및 살해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는 비극의 연속이다. 제국주의 열강이 활개치던 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와 영국의 알력으로 두 차례에 걸친 아프간 전쟁이 발발했고, 20세기 초반에는 주권 회복을 위해 3차 아프간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78년 사회주의 정권의 득세와 몰락, 이로 인한 구소련과의 전쟁, 탈레반의 집권, 탈레반 반대 세력을 활용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등 그야말로 전쟁으로 점철된 현대사다.
저자 아위스타 아유브. (출처=www.awistaayub.com)
이 책의 이야기는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저자 아위스타 아유브 역시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프가니스탄 계 미국인 1.5세이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면 미국, 집으로 돌아오면 아프가니스탄이었던, 두 개의 조국을 오가며 살아가던 저자의 가슴 속에 파쉬토 어(아프가니스탄의 언어 중 하나)가 점점 지워질 무렵 9.11 사건이 발생한다.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은 저자에게 ‘조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청소년 스포츠 교환 프로그램(Afghanistan Youth Sports Exchange, 이하 AYSE)’을 기획하고, 이를 통해 여덟 명의 소녀들을 만나게 된다.
꿈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 그리고 간절함.
이 소녀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왔고, AYSE를 만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사미라, 로비나, 라일라, 프레슈타, 미리암, 아리아나, 나디아, 디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이들은 대체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학교를 가고 싶었으나 학교를 갈 수 없었던 것, 그리고 가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통념 등 이들은 축구 선수라는 꿈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녀들이 어떻게 축구와 연을 맺게 되었는지, 그리고 모두 축구 선수가 되었는지 그 각자의 사연을 모두 소개하지는 않겠다. 스크롤의 압박을 주고 싶지도 않거니와, 케빈 스페이시가 범인인 것을 알려주고 유주얼 서스펙트를 보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삶 속에서 이들이 처해 있던 딜레마가 곧 간절함이 되어 여자 축구팀이라고는 단 한 개도 없었던 아프가니스탄에 신선한 변화를 야기한다.
간절함이 불러오는 변화… 간절함… 나는 내 꿈을 얼마나 간절히 열망했는가….
학교에서 그래프로 배운, 그야말로 말로만 듣던 이 취업난을 절실히 느끼고 있던 요즈음이었다. 치열하지 못했던,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지난날에 매여 부쩍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던 내게, 이 여자아이들과 한 이민자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묵직했다.
간절함이 만들어 내는 변화
간절함은 반드시 변화를 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가 AYSE를 기획하던 2000년대 초반, 아프가니스탄에 여자 축구팀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 축구 피파 랭킹 108위에 올라 있다.(2013년 12월 랭킹. www.fifa.com 참조.) 다소 초라한 랭킹이라고 생각하는가? AYSE를 통해 이 여자아이들이 처음으로 축구를 접한 것이 2004년,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11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아이들의 팀이 우승을 경험하며 '생애 가장 자유로운 90분'을 느꼈을 가지 국립 경기장은 몇 해 전만 해도 경기장이 아니라 처형장이었다. 전통의 유지와 근대화의 갈림길, 외세의 개입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독재 속에서 경직되어버린 아프가니스탄 사회는 이 아이들의 꿈을 쉽게 용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었던, 그리고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던 여자 아이들 몇 명의 간절함은 그들을 둘러싼 편견을 조금씩 무너뜨려 나가고 있다.
간절함은 참으로 변화를 야기한다. 우리가 좋아해 마지않는, 주중보다 주말이 더 졸립고 때로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시차증에 시달리게 만드는 축구만 해도 그렇다. 간절함이 경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 이상이다. 이스탄불의 기적과 같은, 소위 ‘이변’이라 불리는 명승부들은 승리하는 쪽의 간절함이 더 컸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축구에 판정승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골을 향한 간절함의 크기는 선수들의 움직임에 변화를 야기한다. 또 설사 이기지 못하면 또 어떤가? 눈물을 쏟아내지도 못하고 그저 붉어진 눈시울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패자들에게서 간절함을 찾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럼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보자. 새해가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이미 사흘째를 훌쩍 넘겨버린 새해 다짐이 다시 무력해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모두들 하나씩은 이루고자 하는 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게는 ‘축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업종으로의 취업이 그렇지만, 혹자는 결혼이나 연애가 간절할 것이며, 또 누구는 다이어트가 간절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들, 그것에 대해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가?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장애물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내 경우에는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어떤 사람은 시간관리가 도저히 안 될 수도 있고, 식욕이 도저히 억제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밥을 먹고 나면 담배 생각에 도무지 집중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새해를 맞이하여 이 모든 것들 것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다.
그렇다. 변화는 시중 서점에 깔려 있는 수 많은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 간절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간절함에서 골이 터지고, 경기가 뒤집히는 변화가 나타난다. 그 간절함에서 여성 스포츠에 대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사회적 통념이 점차 무너지는 변화가 나타난다. 내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지만, 내 꿈에 대한 그 간절함에서 현장을 뛰어다니며 축구의 감동을 전하게 되는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간절함 속에서 피어날 삶의 변화를 기대해 보자. 새해 결심을 스무 번, 혹은 서른 번 넘게 지킨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번 새해가 끝날 무렵에는 무언가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 본 포스팅은 축구팬의 완소앱, [오늘의 해외축구]와 함께합니다.
'SPECIAL REPO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두아르도] 축구가 직업인 '사람들'의 이야기- 『풋볼멘』 (0) 2014.03.10 [쿠크다스] 대한민국 축구에게 길을 묻다. (0) 2014.03.05 [에두아르도] 2013년의 처음과 끝을 물들이는 승부조작 스캔들. (0) 2013.12.14 [에두아르도]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 그 세번째 편. (0) 2013.12.03 [에두아르도] 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 그 두번째 편. (0) 2013.12.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