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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두아르도] 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 그 두번째 편.
    SPECIAL REPORT 2013. 12. 2. 17:59

    첫번째 편에서는 영국의 전통 축구인 '매스 풋볼'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 모습 때문에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물론 위정자들과 성직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고 해서 매스 풋볼을 즐기는 사람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매스 풋볼에 대한 지배 계급의 인식이 축구가 적응하고 진화하는 과정에 일조했다는 것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는 역사의 큰 흐름, '산업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대적 배경 역시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여러가지 규칙들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축구라고 알고 있는 이 공놀이가 규칙을 갖춘 '스포츠'로 재탄생하게 되는 데 있어서 분명히 어떤 주도 세력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단순한 상호 합의보다는 성문화되어 있는 편이 그 근거가 명확하다. 초등학교 시절에 했던 축구를 되짚어 보면서 생각해 보자. 얼마나 공감할 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살았던 지역의 경우에는 어떤 선수든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누구나 손을 쓸 수 있는 '자유킥'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우스운 '규칙'이지만, 대체로 골키퍼는 축구를 가장 못 하는 아이에게 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골키퍼를 따로 지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임시로 골키퍼가 되는 편이 '우리에게는' 편했다. 그러나 이 자유킥이라는 규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다른 동네 아이들과 축구 시합을 할 때는 구속력을 가질 수 없다. 만약 그 다른 동네 아이들 중에 축구 규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아이가 있다고 치자. 그 경기에서 축구공이 오갈지 고성과 주먹, 울음소리가 오갈지는 모를 일이다. 따라서 규칙의 성문화는 축구가 스포츠로 거듭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이의없이 수용할 수 있는 규칙 하에 경기를 할 수 있다는 데서, 규칙의 성문화는 축구가 대중화되는 하나의 시작점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축구의 규칙이 만들어진 그 시대에 과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축구 규칙의 성문화는 분명히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의 빈부 격차 수준을 감안했을 때, 그 '가방끈 좀 긴 사람들'은 분명히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사회 계층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편에서는 '돈 좀 있고, 글줄깨나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의 축구에 대해 다루어 볼 것이다.


    축구에서 찾은 교육적 가치.


    잠깐 딴 소리 좀 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럭비의 기원에 대해 '규칙을 거부했던 한 학생의 발상의 전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럭비라는 종목의 이름은 그 학생이 럭비 스쿨이라는 사립 학교의 학생이었던 데서 기원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축구 작가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진실을 멋지게 부정하는' 것이다. 그 때는 아직 축구와 럭비가 각기 다른 종목이 아니었다. 그저 럭비 스쿨에서는 그런 규칙으로 축구를 했을 뿐이다.



    (출처=www.footballhistory.eslreading.org)


    이러한 사립 학교들의 담장 안으로 축구가 어떻게 흘러들어갔는지 그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원래 학교 내에서 축구는 상급생이 하급생을 골탕먹이거나 위계 질서 확립을 위한 체벌의 도구로 사용되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몇몇 교육자들이 스포츠에서 교육적 가치를 찾아내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특히 축구는 남성성의 교육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작가는 ‘축구만큼 남자다운 스포츠는 없다. 축구는 용기와 냉정함,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막힐 정도로 영국적이다.’라고 썼다. 사립 학교의 교사들에게 축구는 학생들의 개인주의를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전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 침착함, 자기 극복, 공정함,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단체 경기였던 축구가 적합했던 것이다. '워털루 전쟁의 승리는 이튼 스쿨의 교정에서'라는 웰링턴 제독의 명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웰링턴 제독의 동상.(출처=en.wikipedia.org)


    흥미롭게도 축구의 교육적 가치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체로 이런 명문 사립 학교들의 경우, 기숙 생활을 했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해리 포터 시리즈의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아직 여성에게까지 일반 교육이 허용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 혈기 넘치는 학생들의 성욕이 어디에 분출되었을지에 대한 발칙한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자위 행위 뿐 아니라 학생들끼리의 동성애 문제도 발생했다. 그래서 오늘날 남학생들에게 율무차와 농구를 추천하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사들처럼, 다수의 교육자들은 수음 및 동성애 등 퇴폐적 습관을 퇴출하고 젊은이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축구를 활용하기도 했다. 진짜 발상의 전환은 손으로 축구를 하려 했던 한 학생이 아니라, 골칫덩어리였던 축구에서 교육적 가치를 찾은 교사들에게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학교 대항전과 규칙의 성문화.


    중등 교육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들 사립 학교 간에는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들 학교의 평판은 주로 옥스-브리지 장학생 할당 정원, 고전 교육의 수준, 수업 연한 등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문화 상징물을 내세웠으며, 축구와 같은 스포츠도 학교 간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학교 간 축구 대항전을 하기에는 각 학교의 환경에 따라 축구 규칙이 너무 달랐다. 넓게 탁 트인 운동장이 있는 첼트넘과 럭비 스쿨의 경기 규칙은 매스 풋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럭비 스쿨은 잔디가 깔려 있어 심한 태클과 공을 들고 뛰는 것이 허용되었다. 운동장이 좁은 윈체스터 스쿨에서는 공을 몰고 가는 드리블링 기술을 주로 사용했고, 수도원 마당에서만 축구가 허용되었던 차터하우스와 웨스터민스터 스쿨의 경우에는 넘어질 경우 심한 부상의 위험성이 높아 공을 멀리 차는 것과 핸들링이 금지되었다. 한편 해로 스쿨에서는 팀의 구성원을 11명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규칙의 차이 때문에, 학교 대항전이 열릴 때마다 번거롭지만 경기 규칙을 합의해야 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축구 대항전의 규모가 확대될 수 있는 결정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전국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건설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적인 규모의 대회를 치르는 데 필요한 조건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통일된 규칙과 경기 방법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고, 곧 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출처=thefa.com)


    보편적 구속력을 지닌 규칙의 필요성과 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결국 1848년에 최초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헨리 찰스 몰든이라는 대학생이 해로우, 이튼, 럭비, 윈체스터, 슈류즈베리 스쿨의 대표자들과 함께 케임브릿지에서 회합을 주선했고, 여기서 ‘케임브릿지 규칙’이 탄생한 것이다. 1857년에는 케임브릿지 규칙과는 약간 다른 ‘셰필드 규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축구 규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제공한 것은 케임브릿지 규칙을 만들 때 참여했던 존 찰스 스링1862년에 ‘가장 간단한 경기 규칙’을 만든 것이었다. 이 규칙은 이듬해인 1863, FA의 설립과 함께 채택된 규칙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통일된 경기규칙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핸들링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하느냐와 상대방의 정강이를 차는 해킹(Hacking)을 인정할 것인지의 두 가지였다. 핸들링은 골키퍼에게만 한정시키면서 해결되었지만, 해킹과 관련된 논란은 규칙의 확정에 상당한 진통을 겪게 만들었다. 블랙히스 클럽에서는 해킹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해킹이 금지되면 축구를 하는 데 용기와 담력이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 때문에 궁극적으로 ‘남성다움’이라는 축구의 본질이 파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표결 결과 해킹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블랙히스 클럽은 협회에서 탈퇴했고, FA13개 규칙들을 합의하여 발표했다. 이제 축구는 통일된 규칙을 가지게 되었고 세계를 지배하는 스포츠가 되기 위한 첫번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주체의 문제.


    축구가 통일된 규칙을 갖게 된 과정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규칙에 중간계급의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규칙이 제정된 시기인 19세기 중반은 '남자다움'과 '신사다움'이 곧 영국적이라는 가치관이 강조되던 시대였다. 규칙 제정 과정에서 해킹과 관련된 문제가 남자다움과 연결되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가치관은 오늘날의 축구에도 '비신사적 행위'라는 이름으로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지난 첫번째 편에서 잠시 결론을 유보했던, 축구 발전의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도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물론 보편적 구속력을 가진 규칙이 FA에 의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잘 다듬어진 축구의 변종이 존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축구의 변종들이 최종적 규칙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규칙이 최종적으로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모두 중간계급 출신이었다는 점, 그리고 규칙 형성 과정에서 야기된 논란들이 대체로 중간계급의 가치관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노동계급에 의한 자생적 발전을 주장하는 관점은 설득력이 다소 떨어진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중간계급의 주도로 만들어진 ‘제대로 된 축구’가 이후 노동계급에까지 빠른 속도로 수용되고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축구의 기본 아이디어가 이미 오래 전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 본 포스팅은 축구팬의 완소앱, [오늘의 해외축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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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쓰는 남자, 더 풋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