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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두아르도]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 그 세번째 편.
    SPECIAL REPORT 2013. 12. 3. 20:38

    지난 두번째 편까지 우리는 축구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데 있어서 기초 공사 격에 해당하는 '보편적으로 구속력을 가진 통일된 규칙의 성립'까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축구가 그 단계까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거칠게나마 결론을 내려보았다. 다소 어려운 용어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축구가 '근대 스포츠화'되는 과정까지 본 셈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포스팅을 기획한 것은 단순히 축구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알려는 것이 아니라, 축구가 어떻게 세계적으로 대중적 인기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다. 쉽게 생각해 보자. '인기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의미다. 어떤 것을 특정 집단만 향유하는 것은 '대중적 인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것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향유되며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축구가 어떻게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를 얻게 되었는지를 찾는 것은 축구가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이유를 찾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축구의 사회적 영역 확대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규칙이 성립되고 전국적 규모의 대회를 총괄하는 FA가 설립되면서 축구는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회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축구가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클럽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축구가 완전히 대중적 오락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클럽이 많이 만들어지고, 그 클럽들이 FA에 많이 가입하는 것이 필요했다.


    최초의 축구 클럽, 셰필드 FC (출처=http://www.1857-football.com)


    초기의 클럽들은 부르주아 계급이 지배했다. 최초의 축구 클럽으로 알려진 셰필드 FC1857년에 만들어졌을 때, 회원 29명 중 11명이 공장주 또는 공장주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학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70년대가 되면 학교 외의 다른 환경들이 클럽을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교회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에서 거리의 젊은이들을 데려와 교회 교육시스템을 받아들이게 하는 정책이 성과를 거두면서 주로 잉글랜드 중부와 북동부 지역에서 클럽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청용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볼튼 원더러스도 이렇게 만들어진 클럽 중 하나이다.


    한편, 기업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팀들은 노동자의 독자적 주도로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고용주가 직원들로 하여금 기업에 일체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전자의 경우로 대표적인 구단은 무기 제조업체 윌위치 아스널의 노동자들이 만든 아스널이, 후자의 경우로 유명한 구단은 템즈 아이언워크 사 경영진이 설립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자신을 클럽과 동일시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을 마련한 진정한 환경은 전통 민중문화의 ‘공공성’이 가장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던 대중 주점인 ‘펍'이라고 할 수 있다. 펍이 직접 클럽 선수를 모집하거나 직접 상금을 내걸고 대회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경기장을 확보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세기 말 프로페셔널리즘 논란의 중심이었던 블랙번 로버스가 있다. 한편, 1870년대 이후 거리나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직접 만든 클럽들도 있었다. 이러한 클럽들은 축구의 프로화가 완전히 수용되면서 거의 몰락했으나, 토트넘 핫스퍼처럼 아직까지 1부 리그에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클럽들이 만들어지는 환경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축구가 사회적으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출처=http://www.techdigest.tv)


    이처럼 축구가 사회적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도 여가 소비 방식의 변화에 힘입은 것이었다. 산업화 초기의 영국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2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1830년대 들어 노동 시간은 점차 단축되기 시작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노동 시간을 줄일 여지가 높아졌고, 노동자의 영양 부족은 장기적으로 자본가의 자본 축적을 가로막는다는 인식도 노동시간 단축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요인은 중간계급 출신 개혁가와 노동계급이 주도한 노동시간 단축운동이었다. 그 결과 1847년에 10시간 노동법이 통과되었고, 1850년대 이후 노동시간 단축의 추세는 계속되어 1870년대에는 9시간 노동이 확립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계급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물가가 하락하면서 1860년부터 1900년 사이에 노동 계급의 실질임금은 60%정도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숙련공 사이에서 두드러졌고, 이들은 축구를 즐기는 주된 계층이 되었다.


    노동계급이 축구에 열광할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축구는 19세기 후반 가장 인기 있는 여가활동으로 도약했다. 이는 관중 수의 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1871/1872시즌 FA컵 원년 결승전 관중은 2,000명 정도에 불과했는데, 사반세기가 지난 뒤에는 66천명이 결승전을 지켜봤다. 관중 수는 계속 늘어나서 새로운 세기의 첫 결승전에는 11820명이 토트넘 핫스퍼의 우승을 관람했다.

     

    1901년 FA 컵 결승전에 운집한 관중들. (출처=http://footysphere.com)


    직업 선수의 출현과 프로페셔널리즘의 공인


    중간계급에서 노동계급으로 축구가 사회적 영역을 확장한 것은 관중 뿐 아니라 피치 위에서도 나타났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은 1883FA컵 결승전에서 노동자 팀인 블랙번 로버스가 올드 이트니언스를 누르고 우승컵을 차지한 것이었다. 이후로 우승컵을 차지하는 팀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팀이었다. 한편, 축구선수를 직업으로 삼는 ‘노동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직업 선수는 퍼거스 서터였는데, 1880년에 블랙번 로버스로 이적하면서 1883'최초의 노동자 구단의 승리'라는 역사적 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퍼거스 서터 (1858~1916) (출처=en.wikipedia.org)


    이러한 직업 선수들은 축구를 직업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다른 직업에 종사하며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선수가 아닌 것이다. 이들이 직업 선수로 뛰는 것은 힘들게 육체노동을 하지 않고도 ‘취미’를 즐기며 돈을 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는 볼튼의 선수로 뛰었던 냇 로프트하우스의 말에 잘 드러난다. 그는 축구를 직업으로 삼기로 한 이유에 대해 자신은 광산에서는 ‘일’을 했지만, 축구를 하면서는 놀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FA를 창설한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매우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은 축구를 신분과 교양의 증거로 인식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축구 경기는 반드시 신사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으며 이는 ‘페어플레이’라는 행동규범으로 묶였다. 이들에게 직업 선수의 출현은 ‘젠틀맨’의 경기인 축구의 정신이 훼손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돈을 벌어야 했던 남자들은 더 이상 ‘스포츠 정신’이 아니라 ‘이익’을 경기에서 더 중요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젠틀맨의 페어플레이 정신에는 스포츠 경쟁이 자제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이들은 심판제와 페널티킥의 도입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1874년에 엄파이어(Umpire), 1880년 레퍼리(Referee) 제도가 도입되고, 1891년에 페널티킥이 도입되면서 젠틀맨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스포츠 외의 이해관계를 경기장으로 들여오지 않는 자신들의 축구는 심판이나 징계가 필요 없는 깨끗한 축구라는 아마추어리즘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코린티안스 같은 아마추어 팀은 페널티킥을 얻으면 고의적으로 실축하거나, 페널티킥을 내주면 골키퍼를 세우지 않는 등의 관습을 만들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리즘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노동계급의 대중적 열정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직업 선수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이들과 계급적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관중들이 열광한다는 점은 이러한 추세를 부채질했다. 클럽의 운영진은 경기를 보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관중들을 더 끌어 모으고 싶어했다. 입장권 판매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당장은 ‘축구 노동자’들에게 돈을 투자하더라도 그들을 더 많이 고용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82년에 FA 지도부의 젠틀맨들은 직업 선수의 고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 와중에 1884,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비롯한 몇몇 클럽이 직업 선수를 고용했다는 제소를 당해 FA컵에서 실격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프레스턴 측은 조사위원회에서 직업 선수에 대한 재정 지원을 시인하며, 북부 클럽에서는 이것이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관행이라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사건은 FA 내부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1885, 프로페셔널리즘의 조건부 합법화가 승인되었다.


    그러나 클럽들은 지속적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추가 수단을 찾아내려고 했다. 이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운영되는 컵 대회의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클럽 입장에서는 만일 팀이 패배하여 해당 시즌의 잔여 경기가 없으면, 상대적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친선 경기를 통해서나 수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888년에 프로 리그가 창설되게 되었다. 곧 리그에서는 아마추어가 사라지게 되었으며, 모든 클럽은 이익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처럼 되었다. 관중들은 자신들의 동지들이 경기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며 열광했고, 축구는 사회적으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중간 계급 출신 젠틀맨들은 이제 축구 외의 다른 곳에 눈을 돌려야 했다. 특권층의 개인 스포츠를 선호하거나, 지난날 자신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며 거부했던 럭비로 옮겨 갔다. 그러면서 이에 대해서도 정당화를 잊지 않았다. 럭비와 같이 폭력성이 내재한 스포츠야말로 엉망이 되지 않으려면 한층 더 자제력과 페어플레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중간계급 출신 젠틀맨들이 스스로 축구로부터 퇴장하면서, 이제 축구는 완전히 노동자의 스포츠가 되었다.



    축구 대중화의 득과 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즌 티켓이라고 한다. (출처=www.eurosport.com)


    프로페셔널리즘이 완전히 정착하면서, 선수와 클럽은 자본주의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제 축구에서 ‘프로페셔널리즘’이란 말은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게 돈을 버는 것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선수들의 신체는 곧 재산이자 자본이 되었으며, ‘진정한 프로’는 감독의 지시에 잘 따르고, 평소에 영양과 컨디션 관리, 개인기를 꾸준히 연마하는 ‘직업적 자세’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선수들의 치솟는 몸값은 클럽 운영진으로 하여금 또 다른 수익 구조를 찾게 했으며, 초기 FA의 젠틀맨들이 걱정했던 대로 상업화에 물들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마추어리즘의 이상을 굴복시킨 노동자들의 열정은 광고 수입과 도박 회사의 자금 유입 등으로 점차 흐려지게 되었다. 선수와 팬 사이에 형성되어 있었던 계급적 동질감은 직업 선수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 상승으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축구는 이제 대중의 스포츠가 되었다. 축구팬들의 토요일 오후는 축구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리그와 컵 대회의 운영이 안정화되면서, 축구는 이야기 구조를 얻고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대중에게 축구라는 세계가 정착되는 데는 당시 점점 성장하던 대중매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1870년대에는 벌써 다수의 스포츠 잡지가 있었고, 거의 모든 신문이 별도의 스포츠면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1876년 의무교육제 도입으로 인해 더 힘을 얻게 되었다. 문맹이 사라지면서 축구를 읽는 무수한 독자들이 생겨났고, 대화의 소재를 제공했다.


    스탠리 매튜스. '드리블의 마술사'로 불렸던 그는 축구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출처=www.bbc.co.uk)


    대중매체와 펍에서의 축구토론으로 매주의 경기가 확대 재생산되는 동안, 선수들은 지역 공동체의 대표로써 ‘지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이는 나중에 직업 선수에 대한 주급 상한선이 폐지되고 선수의 금전적 가치가 올라가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선수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은 1965223, 스탠리 매튜스가 축구 선수로써는 최초로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은 것이다. 노동계급은 점점 더 탈정치화했고, 모든 사회 계층이 축구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사회적 통합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영국에서 대중의 스포츠로 자리잡은 축구는 브리튼 섬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축구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영국인이 관련되어 있었고, 따라서 영국과 경제적·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은 나라들부터 축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을 중심으로 축구는 또 다른 곳으로 퍼져나가 각 지역의 문화적 특징에 맞는 축구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축구는 영국의 스포츠를 넘어 세계인의 스포츠로 발전하게 되었다. 


    '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끝.


    * 본 포스팅은 축구팬의 완소앱, [오늘의 해외축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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