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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축구는 어떻게 축구가 되었을까? - 그 첫번째 편.SPECIAL REPORT 2013. 12. 1. 21:00
축구팬에게 주말은 외려 더 피곤하다. 밤새 해외 축구를 보고, 다음날 오후에 낮잠이 당길 무렵엔 또 K리그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대륙 반대편에서 챔피언스 리그니 유로파 리그니 하는 경기가 있으면 주중에도 캄캄한 새벽에 또 축구를 본다. 한국 국가대표팀이 중동이나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치르는 경기는 차라리 드문드문 있으니 애교다. 만약 유럽이나 남미에서 열리는 월드컵, 또는 각 대륙별 컵 대회까지 챙겨 보는 사람은 자신을 야생 인간으로 자각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 한 팟 캐스트에서 어느 축구 전문 기자가 한 말은 매우 옳다. 세상은 축구를 '너무' 많이 한다.
(출처=http://worldsoccertalk.com)
세상이 축구를 이렇게 많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축구가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라는 증거다. FIFA가 4년마다 발표하는 보고서 '빅 카운트'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100명 중 4명은 축구를 즐기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지난 남아공 월드컵을 밤 지새워가며 봤다면 전 세계에 이름도 모를 동지들을 수십억 명 가진 셈이다. 남아공 월드컵 TV 시청자 수를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소한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결승골을 지켜봤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인기다.
도대체 축구의 마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축구팬들이라면 내가 왜 여기에 목을 매고 밤을 새고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사실 생각보다 꽤 오래된 질문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명한 축구 저널리스트 빌리 마이슬은 이미 1920년대에 이런 의문을 안고 있었다. “축구는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는가?“
축구의 매력, 단순하면서도 보편 타당한 규칙.
확실히 축구에는 대중적 열광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함’이다. 축구를 하는 데는 패스와 드리블이 가능한 일정한 크기의 구체를 제외하면 특별한 도구나 개인장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공이 없어도 필자는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는 학교 복도에서 삼선 슬리퍼를 잘라 '복도 축구'라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그래서벌도 많이 섰다.....-_-;;) 이러한 축구의 특징은 다른 스포츠에 비해 환경의 제약을 덜 받게 만들었고, 보다 쉬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단순함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축구의 인기를 설명할 수 없다. 규칙이 상대적으로 단순하다고 하더라도, 그 게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규칙이 존재해야 한다. 국제 대회에서 참가국마다 다른 규칙을 갖고 경기를 했다고 상상해 보자. 사실 그런 형편에서 국제 대회가 있을 수조차 없겠지만, 분명히 그 대회는 엉망 진창이 될 것이다.(출처=www.fifa.com)
그렇다면 축구의 규칙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가? 그렇다. 영국이다. 축구의 기원이 '영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발로 둥근 물체를 어떤 물체를 특정 목적지까지 몰고 가는, 또는 발로 차올리는 구기의 원형은 세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능력이 된다면다른 포스트에서 다루어 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축구라는 단어에서 연상하는 스포츠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맞다. 왜냐하면 그 규칙이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따라서 19세기 영국에서 축구가 어떻게 오늘날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축구의 마력을 찾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보편 타당한 규칙'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으며, 축구가 놀이에서 스포츠로 변태하는 데 있어 어떠한 시대적·사회적 가치관이 반영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골칫덩어리였던 축구.
축구, 그러니까 '풋볼'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이미지 때문에 이 공놀이의 핵심적 특징이 공을 발로 차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 있는 19세기 이전까지 축구의 모습과 방식은 현대 축구와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몇몇 민속 경기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볼 때, 반드시 공을 발로 다루어야 한다거나 양 팀의 인원 수를 규정하는 규칙을 갖지는 않았다.
‘풋볼’이라는 말 역시 처음에는 이 공놀이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의 저서, 『축구란 무엇인가』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토마스 내쉬라는 풍자작가의 시를 인용하며, 지금은 사라진 동사인 ‘풋볼하다.(to football)’라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빽빽하게 달라붙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오히려 아주 옛날의 축구는 많은 사람들이 공 위로 몰려들어 서로를 짓누르는 드잡이 싸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출처=www.fifa.com)
따라서 '매스 풋볼'이라는 이 전통 축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기 양상은 상당히 무질서하고 거칠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고, 심지어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축구 금지령이 내려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표적이니 예로, 에드워드 3세가 내린, '건강한 남자들은 모두 여가 시간에 활과 화살로 구슬이나 화살촉을 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축구 금지령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의 군대에서 궁수는 전력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 궁수는 축구 경기에 참여하는 주축 사회계층이었던 자유농과 수공업자들에서 징발되었다. 왕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축구 경기를 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것은 전투력의 손실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무질서하고 폭력적인 매스 풋볼은 국가 입장에서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유흥으로 간주되었다.
(출처=en.wikipedia.org)
위정자들만 축구를 골칫덩어리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축구에 대한 공격은 16세기 이후 청교도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들은 축구의 무절제함이 영혼을 더럽히고, 그 폭력성 때문에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규율 있는 노동, 감정 억제와 쾌락 제어를 비롯한 엄격한 자기 훈육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충동적이고 무질서한 축구는 하찮고 신성 모독적이며 쓸데없는 오락거리일 뿐이었다. 청교도들이 무엇보다도 축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 것은 축구가 안식일 준수를 깨뜨린다는 점이었다. 어떤 목사는 축구가 갖는 폭력적이며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수많은 죄악의 감정이 생겨나고, 살인과 피바다를 낳는다고 주장하며 “이 잔인한 경기가 주일에 할 짓인가?”라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적 사회 분위기와 국가의 지속적인 통제로 인해 축구를 하는 사람들의 수는 다소 감소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의 명맥은 계속 유지되었고,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변화라기보다는 적응에 가까울 것이다. 그 변화가 일어난 곳 중 한 곳은 사립 학교(Public School)의 담장 안이었으며, 다른 한 곳은 도시의 좁은 골목길과 거친 흙바닥이었다.
적응과 진화.
축구는 ‘신의 가르침’과 ‘왕의 명령’에도 죽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축구는 ‘거칠고 무질서한’ 것으로부터 ‘부드럽고 규칙을 갖춘’ 것으로 변화했다. 당시 영국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왜 축구가 변해야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가장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다. 인클로저 운동은 생산 수단과 생산자를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매스 풋볼의 거친 성격으로부터 축구를 분리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토지 소유권을 절대화하고 공동지를 없앰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집단으로 매스 풋볼을 즐길 수 있는 넓은 들판, 즉 ‘경기장’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둘째는 산업 혁명이다. 태양과 계절, 그리고 봉건적 의무에 의해 결정되던 여가 시간은 이제 공장의 인공 불빛과 그 소유주들이 엄격히 제한하는 일정에 따라 결정되었다. 이러한 시간적·공간적 제약은 축구가 더 이상 과거의 거친 매스 풋볼의 모습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더하여 공공도로 법(1835)과 경찰 법(1840)이 도입되면서, 매스 풋볼로 야기될 수 있는 소란을 공권력이 쉽게 진압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1860년, 애쉬본에서 오랜 민중 놀이를 되살리려는 최후의 시도가 진압되면서, 매스 풋볼의 전통은 거의 모든 곳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매스 풋볼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해서 축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19세기 전반기에는 나름의 규칙을 가진 축구들이 이미 여러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축구를 과연 누가 발전시켰는가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루겠지만, 일반적으로 축구의 규칙은 사립학교의 학생들이 모여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케임브릿지 룰'이라는 초기 규칙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몇몇 스포츠 사학자들은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1830년부터 1859년 사이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만 93개의 축구 팀이 존재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러한 축구 팀들이 하는 경기들 중에는 경기 시간, 필드와 골대의 규격, 양 팀의 인원, 승리 규정, 심판의 유무 등을 규정한 것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 중 한 명은 존 골스턴은 다음 편에서 다룰 '사립 학교 축구'보다 더 세련된 수준의 규칙을 가진 것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출처=www.diplox.com)
이러한 논쟁에 대한 필자 나름의 결론은 본 편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축구의 규칙 제정에 있어서 사립학교 학생들의 역할을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편에서 사립학교 축구에 대해 다룬 뒤 필자 나름의 결론을 내려볼 것이다. 다만 필자는 학자가 아니라 일개 블로거에 불과하므로,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어두도록 하겠다. 힌트는 인클로저 운동에 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토지에서 분리되고, 일거리를 잃은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시로 왔다고 해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놀이까지 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넓은 들판이 아니라, 도시의 좁은 거리와 단단한 공터에 알맞게 변형된 어떤 공놀이를 즐겼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일정 크기의 공터, 공, 그리고 네트만 있으면 족구를 즐기듯이 말이다.
* 본 포스팅은 축구팬의 완소앱, [오늘의 해외축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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